[깨우치는 당신은 행복하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환멸을 느껴야 했다. 그가 돈으로 산 것은 행복이 아니라 한 때의 쾌락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지위로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곧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그가 지위로 차지한 것은 한 때의 영화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또 명예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또한 실패했다. 그가 명예로 누린 것은 행복이 아니라 한 때의 허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단어를 말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는 그 감미롭고 편안한 느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행복의 느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은 매진하고 또 매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여 갈수록 사람들을 편안하게해 주는 현대의 메커니즘 속에서 이런 행복의 느낌을 잃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인간의 행복이 "생활의 편의" 나 "기술의 진보"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행복의 의미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너무 허황된 것에 기대를 하고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큰 것에 기대를 하여 뻔한 결과에 실망을 하고는 이내 실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은 웃기보다는 찌푸려 있는 때가 더 많은지도 모를 일이다.
철학자 아랑의 [행복론]을 보면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어린애가 갑자기 까무러칠 듯이 운다. 당연히 아이의 부모가 약을 먹인다. 의사를 부른다 법석을 떨고 있는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이웃집에서 할머니가 왔다. 그 할머니는 아기를 한번 보자면서 여기저기 살피고는 작은 바늘이 하나 옷에 꽃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바늘을 빼내자 죽을 듯이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는 방글방글 웃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이렇듯 행복이란 언제나 조그만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잔잔한 열락을 가져다 주는 행복. 그러한 행복은 결코 크고 위대한 데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려 작고도 성실한 데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다만 그것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어 놓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앙드레 지드가 쓴 소설 중에 [전원 교향악]이라는 작품이 있다. 비록 불구의 몸일지라도 깨우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 작품을 간추려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어떤 날 밤, 나는 소경인 수양딸 젤트류드를 음악회에 데리고 갔다. 곡목은 마침 "전원 교향악" 이었다. 내가 "마침" 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것 이상 그녀에게 들려 주고 싶은 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우리가 극장을 나선 이후에도 그녀는 마치 황홀경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궁금한 듯 물어왔다.
"세상은 정말 그래요?"
"무얼 말이냐"
"음악에 나오는 저 실개천가의 경치... 정말 그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가요?"
그러나 나는 곧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음악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에서 죄악이 사라지면 그러할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곡이었기 때문이엎ㅆ다. 더욱이 그 때까지 그녀는 죄나 악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탄하듯이 말했다.
"아쉽게도 눈 뜬자는 보는 행복이 뭔지 잊고 있어"
그러자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앞 못 보는 나는 듣는 행복을 알고 있는 걸요"
그렇다 따뜻한 햇살이 우리를 감싸고 향긋한 꽃내음이 우리의 코를 간질여도 우리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넘어가는 때가 많다. 퇴근 길, 서쪽 하늘에 일몰이 아름답게 수를 놓아도 우리는 그것을 스치고 지나가는 때가 대부분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조금만 주변에 관심을 가져도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것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ㅜㅂ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대신, 괜한 일로 화를 내고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일에 매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덯게 하면 남을 앞설 수 있을까 골몰하다가 보니 미처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거니와 남을 위해 돌맹이 하나 치우는 아량도 베풀 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자면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해 본다만 그것은 말 그대로 변명에 불과하다. 문을 꽁꽁 닫아 두고 있는데 누가 찾아올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먼저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손님을 맞이하자면 우선 방부터 치워 두고 초대하는 것이 옳은 순서가 아니겠는가. 욕심과 교만, 질투와 시기심 같은 지꺼기들을 말끔히 쓸어낸 다음 관심과 사랑이라는 벽지로 마음의 방을 정갈하게 꾸며 놓아야 비로소 행복은 찾아올 것이다.
매사를 사랑으로 감싸는 마음, 상대방의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관용, 주변의 풍경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가능하다면 그것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애정과 관심, 그런 것들이 자신의 마음에 쌓여갈 때 우리는 참으로 평화롭고도 보람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봄이 어디쯤 가고 있는가? 지금 어떤 꽃이 지고 있는가? 그것을 느낀다면 이미 당신은 행복하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정하 중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0) | 2019.02.20 |
---|---|
랄프 왈도 에머슨의 무엇이 성공인가 (0) | 2019.02.20 |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0) | 2019.02.18 |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0) | 2019.02.18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0) | 2019.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