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캐나다 이민자 아줌마의 이민 육아 이야기
캐나다 현지 이민 법률 회사 3년 경력 아줌마의 캐나다 이민, 생활, 육아, 힐링 관련 정보 공유 블로그.
약산 김원봉 장군에 대한 단상과 우리의 현실

 

 

조선왕조 5백년의 끝자락에 우리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됩니다. 당대 많은 지식인들과 선지자들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벌이며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창 했습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당시 현재 가치로 300억이 넘는 현상금이 걸릴 만큼 일제가 가장 무서워했던 독립군 이었습니다. 미국 쌍둥이 빌딩 테러당시 빈라덴에게 걸렸던 560억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현상금 이었다고 하니 김원봉 장군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만 합니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의 노선은 다양했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하던 그룹과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의 두 견해가 가장 극명한 대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김원봉은 일본이 속해 있는 세계 강대국 무리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주창해봤자 들어줄리 없다고 생각해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주요 건물들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며 일본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우파 계열의 민족주의 운동과 좌파 계열의 사회주의 운동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합작론을 주장합니다. 함께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선생님과 여운형선생님등의 주요 인사들이 힘을 합쳐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가 절대 아닙니다!!)

당시 좌파라고 불리던 세력들이 주창하던 정책들은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만들자는 주의 였습니다. 요즘 시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개념과 비슷한 개념인데, 당시 조선 민중들의 70% 이상이 찬성하던 개념이 사회주의 였습니다.  (사회주의는 개인주의의 반대로 개인의 이득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우리가 받았던 극 공산주의 개념(빨갱이)과는 차원이 다른 이데올로기 입니다. 왕권 정치 아래 신분제를 통한 지독한 빈부격차를 겪으며 살았던 조선 민중들은 일제 35년간의 식민치하에서도 2등 국민으로 차별받고 불공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라는 사회주의 개념은 당시 조선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해법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해방된 조선에서는 조선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동양의 미개한 나라 이며 일본의 식민지 정도로 인식한 미군정이 들어서며 더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말그대로 무식한 미국 군인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형식이었으며 이들은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도 잘 몰랐으며 민족감정을 인지하지 못해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됩니다. 

 

일제 35년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셨던 분들은 암살을 당하거나 테러를 당해 지배층에서 사라지고 되려 일제에 붙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 우리 민족 투사를 고문하고 잔인하게 살해 했던 자들이 완장을 차고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빨갱이로 몰아 죽이며 잔악하게 권력을 잡아가던 세상. 이러한 혼돈의 사회에서 우리는 정말 귀중하고 훌륭하신 분들을 많이 잃게 됩니다. 

이는 6.25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는 빨갱이 살상으로 포장되어 제주에서 여순에서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로 이어집니다. 당대에 공부 좀 했다는 사람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로 몰려서 재판도 없이 살해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미군정, 이승만, 친일파들, 서북청년당 등등 자신들이 죄를 짓는지도 모르는채 엄청난 수의 자국민을 살상한 그들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지배층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며 건국 공로 훈장까지 받고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이러한 조국의 상황에서 일제 친일파 악덕 고문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가 수모를 당하고, 일제 시대에도 한번도 일경에 잡힌 적이 없었던 김원봉 장군은 사흘 내내 통곡을 하고 우셨다고 합니다. 밀양이 고향이고 가족들 모두 밀양에 거주하기 때문에 남쪽에서 계속 살고 싶으셨지만 각종 테러와 위협으로 도저히 남한에서 살기가 어려워지자(그리고 당시 남한의 상황이 너무 X 같았기 때문에) 김구 선생님과 북한 김일성을 만나러 간 그 이후 북에 남으셔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 돌아오신 김구 선생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안두희에게 권총을 맞아 돌아가시게 됩니다.) 

 

전쟁 당시 남침을 반대하고 납북된 남한 출신 정치인들과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김원봉은 북한에서도 1958년에 간첩혐의로 몰려 숙청 당했습니다. 남한에서는 월북해서(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가족들은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 당하였음), 북한에서는 미제간첩으로 숙청당했기 때문에 양 쪽 에서 모두 외면한 채 60년 가까이 그의 독립운동사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습니다. 

의열단, 조선의용대 대장,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했던 김원봉의 생은 참으로 비참하고 슬프게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온몸을 받쳐 조국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던 그가 어떻게 이런 취급을 받으며 후손들에게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것인지 서글픕니다. (차라리 친일파로 민족반역자로 살아 부를 축적하고 독립후에도 나라의 권력을 휘어 잡으며 후손 대 대로 잘먹고 잘사는 삶을 선택했더라면 그의 가족과 후손들은 오히려 더 행복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분단이 아닌 통일된 하나의 국가 였다면 그 어느 독립운동가 보다도 높이 서훈 받았을 김원봉 장군의 생애가 더욱 애틋해지는 하루 입니다. 

6.25전쟁은 김일성과 소련이 벌인 전쟁입니다. 어떤 북한 주민도, 또 어떤 남한 주민도 죄가 없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으로 북한에서도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고문당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6. 25전쟁을 통해 죽은 것도 우리 민족이고 경제적 손실을 본 것도 우리 민족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아직까지 두 개의 국가로 나눠져 연간 44조가 넘는 국방비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입니다. (연간 44조면 우리나라 대학생들 전체가 무상 대학 교육을 받고도 남는 돈입니다. ㅜㅜ EU에 속한 대부분의 국가가 국립대의 경우, 무상 대학 교육을 받고 있지요.)

 

전쟁 당시 최대의 수혜국이 어디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일본 입니다. 일본은 전쟁당시 전쟁 물자와 군수품등을 한국에 팔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 돈을 기반으로 일본 경제는 엄청 살아나게 됩니다. 2차 세계 대전 패전국으로 일본도 매울우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한국전쟁으로 그들은 다시 일어서게 되고 세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해방이 되고 7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보이지도 않고 실효도 없는 이념 전쟁을 하고, 어떤 이들은 자국 보다 일본의 이익을 위해 대한 민국 국민들을 분열시키고, 가짜 뉴스로 국민을 현혹하고 선동질하며, 정말로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나라가 발전하는 정책 싸움이 아닌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슴없이 거짓말을 하며 국민들을 분탕질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연봉이 1억 5천만원 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혜택도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국회의원 뱃지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적폐 정치세력, 언론세력 그자들이 사라져야 대한민국은 진정한 독립을 이루고 더욱 발전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김원봉 육성 연설 보러 바로가기

지식채널 약산 김원봉편 보러 바로가기

 

  Comments,     Trackbac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