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는, 우리 선배들이 누렸던 캠퍼스의 낭만 이라던지, 나라의 앞 날을 걱정하며 최류탄을 던지던 강인한 의지라던지, 그저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취업이 잘되었던 그 시절의 여유라던지 하는 것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대학 자체가 취업을 위한 또 하나의 고3시절인 양 학점과 영어성적에 목숨을 바치며(사실 나는 바치치 않았다 ㅠㅠ) 살아가는 친구들과 함께 그 찬란한 시절을 보내버려야만 했다.
집안 사정으로 하고 싶었던 꿈은 그대로 접고(사실 난 종군기자가 꿈이었다. 캬. 멋지지 아니한가. 전장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그 순간의 참담함과 인류애를 글로 담아 세상에 전파하는 그 자체만으로. 근데 생각해보니 한국 기자가 발령받을 만한 전쟁터는 그 이후에도 계속 없긴 했다. ㅠㅠ)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직장 생활이 참 힘들었다. 사실 적응도 잘 안됬고 (겉으론 안그런척 했지만) 재미도 없었고 이게 꿈에 그리던 직장생활인가 하는 허무감과 상실감이 매일 산사태처럼 몰려오던 어느날,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H양의 손에 이끌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프리다 칼로 전"을 보러가게됬다. 원래 클로드 모네의 우아하고 색감이 예쁜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그녀의 그림들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드랬다.
"상처 입은 사슴" 이라는 작품 앞에서는 내가 그 사슴인지 사슴이 나인지 모를 만큼 온전히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 시절 내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해 온전히 받아야 했던 온갖 화살들을 그 아픔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예쁜 그림은 한 개도 없었지만 그녀가 가진 내면의 슬픔들에 공감하며 관련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참으로 가슴 아픈 그녀의 일대기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가장 좋아했던 S언니와 함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라는 영화를 보게됬다. 우린 당시 둘 다 쏠로 였고 퇴근 후 할 일이 없었으며 크게 멋드러진 취미도 없었드랬다. 해서 금요일 밤 오직 한 상영관에서만 방영하던 그 영화를 마지막 타임에 그것도 커플석에서 함께 보게 되었다. 이건 또 뭐야! 아 이여자 진짜 짜증나. 왜 일생을 이렇게 사는거야. 겁내 욕해주고 불쾌한 심정이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S언니와 나는 또 펑펑 울었다. (참! 마츠코 OST 정말 좋았다. 감독이 편집과 영화음악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한 해에 동시에 나는 예쁘고 멋지지만 불행한 인생을 살아 낸 두 여자를 만났다. 저렇게 괜찮은 여자들이 왜 남자 때문에 삶을 망친걸까? 그 두 여인이 왜 그렇게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는지 나는 몰랐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특히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절대 가지지 않겠다 라고 굳게 다짐했었기 때문에 (정말 헬 조선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구요!!) 당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 때의 나는 싱글이었고 그녀들의 삶을 100%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저 저 여자들보다는 내가 낫구나 하며 싸구려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애들을 재우고 와인을 홀짝 거리며 딴지 일보를 읽다가 벌써 10년도 지난 그 때의 일이 오늘 밤 갑자기 떠올랐다. 왜인지 잘 모르겠다. 진짜 그냥 갑자기 무작정 그 때의 단편 기억들이 조각 조각 천을 잇듯 생각이 났다. 나도 어쩌면 그저 40줄에 들어선 인생일 뿐인데 아직 남은 생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뭘 안다고 그 사람들 보다 내가 낫다는 미천한 생각을 했던 것인지. 참.
프리다 칼로와 마츠코의 공통점, 삶의 가치를 받는게 아닌 주는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그녀들의 삶. 아이를 낳고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면서 그런 가치가 있다는 걸 더 많이 깊게 알게 된 것 같다. 그렇지. 받는 것보다 주는게 더 기쁠 때가 있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신조차도 한사람의 일생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사후까지 기다린다는...
또 다시 삼천포로 빠지는 내 글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를 다시 한번 깨닫고, 결론은 그 때 내 소중한 친구 H와 S언니가 사무치게 그리운 밤이라는 것이지. (취한 게지. 취한게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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