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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에세이, 못했지만 잘했어요.




영어에서 쓰는 수사법 중 "옥시모론"(Oxymoron) 이라는 게 있다. 영한사전에는 모순형용법 이라고 해석되어 있는데, 서로 상반되는 의미의 단어를 병치하여 상황을 강조하거나 독자의 관심을 끄는 비유법이다. 예컨데 오래전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뉴욕타임즈>의 헤드라인은 "작은 거인 암살당하다" 였는데 이것도 옥시모론의 일종이다. 즉 신체적으로는 작지만 권력이나 영향력 면에서는 거인이므로, 얼핏 보기에 서로 모순된 이미지이지만 함께 쓰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환기를 불러일으키는 부수적 효과까지도 갖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아이슈타인과 같이 일반 사람들이 익숙한 일에는 서투르고 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성을 발휘하는 사람을 이르는 "우둔한 천재"나 "어두운 빛"과 같은 이미지 묘사 또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다 아는 비밀" 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모순 형용법의 일례이다. 

수사법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소개하려고 혹시 예가 될 만한 표현을 접하면 적어두기도 하는데, 얼마 전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예를 발견했다. 일요일 밤에 방송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이라는 프로그램인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치료와 가정적 문제를 도와준다. 

몇 주 전 그 프로그램은 가난한 장애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초등학교 5학년 진호를 소개했다. 나이에 비해 몸집이 아주 왜소한 진호는 작년까지는 건강했으나 올해 들어 모계 유전으로 조금씩 장애가 와서 팔과 다리가 휘기 시작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 수 없어 늘 말이 없고 학교에서도 외톨이에 잘 웃지 않는 아이였다.

우선 소아정신과 의사가 진호와 면담을 했다.

"몸이 불편해서 마움이 아픈 적이 있니?"

"항상 그냥 마음이 답답해요"

의사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하나 그려 보라고 하자 진호는 집과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이 나무가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하고 의사가 묻자 진호는 대답했다.

"외로워요. 그래서 슬퍼요"

자신의 외롭고 슬픈 마음을 그림 속 나무에 투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늘 집에만 있는 진호 부모에게 다른 부모처럼 사회 활동을 할 것을 권했고 신체 장애인인 진호 아버지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직장구하기에 나섰다. 또한 무언가 함께 가족 활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에 따라 가족이 다함께 볼링장에 가는 장면도 나왔다. 

진호는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나들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지, 얼굴이 화색이 돌고, 숨기려고 해도 내내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진호 아버지는 젊고 몸이 덜 불편했을 때는 볼링을 꽤 잘쳤다며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빠는 아들 앞에서 열심히 볼링을 쳤다. 하지만 오랜만에 치는 볼링이 잘될 리 없었다. 열 개의 핀 중에 고작 대여섯 개 맞히면 잘하는 것이었다. 종합점수가 어주 낮게 나오자 진호 엄마가 민망한 표정으로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 잘 못했지.안그래?"

그러자 진호가 눈을 크게 뜨고 답했다.

"아뇨 못했지만 아주 잘했어요!"

즉 객관적인 점수는 못했지만, 사랑하는 아빠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점수는 "아주 잘했다"는 진호의 옥시모론 적인 답변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주에 어떤 장애인 단체의 모임에서 한 청각 장애인 사회자가 한 말도 바로 모순 형용법이었다.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지만, 들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의 눈으로 다른 이의 기쁨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귀로는 들을 수 없지만, 마음의 귀로 다른 이의 아픔을 듣고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의 배려로 친구도 생기고 성격도 많이 밝아진 진호를 보여주며 TV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못했지만 잘했어요" 진호의 훌륭한 모순 형용법 구사가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다 진호 못지않은 모순 형용법 구사가들인지 모른다. 정말 착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슬며서" 에라 나만 착하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나, 아무렇게나 살자" 나쁜 생각을 품기도 하고 다시 "아니 그래도 인간인데, 인간답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뿐인가. 잘난사람 못난사람,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 등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또 서로 보완하고 도와 가며 함께 어울려 그런대로 한 세상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세상이야 말로 제일 좋은 모순 형용법의 예이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에세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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